연산군(1476년~1506년, 재위: 1494년~1506년)은 조선의 제10대 국왕입니다.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융(李㦕)입니다.
연산군은 즉위 초기에는 성종의 정책을 이어받아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리울 만큼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치를 하였으나
1498년 사림파를 탄압하는 갑자사회를 일으켜 많은 학자와 관료를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의 정치적 불안정을 가중시켰습니다.
1504년에는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련된 자들을 처벌하는 무오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그의 폭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연산군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고, 이를 위해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의 폭정은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이어져 폐위되었습니다.
춤과 노래를 좋아했던 연산군은 1505년 채홍사를 시켜 “모든 도의 고을들은 모두 운평을 두라”고 명했는데, 운평(運平)은 가무(歌舞) 기생을 말합니다.
전국에서 무려 1만 명을 모았고, 이들 중 다시 미모가 뛰어난 이들을 엄선해 궁궐로 불러들였는데 이들을 ‘흥청(興淸)’이라 불렀습니다. 맑은 기운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장녹수도 '흥청' 출신이었는데, 궁궐에 들어오자마자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연산군의 총애를 한껏 받은 장녹수는 연산군을 믿고 권세를 마음껏 휘둘렀습니다.
그녀는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고, 뇌물은 물론 인사 청탁도 많이 받아 연산군 폭정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연산군은 경복궁의 경회루에서 늘 흥청들과 노는 잔치를 벌였고, 그 호화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연산군이 이렇게 여자에만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사치 부리는 사이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 갔습니다.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연산군이 폐위되자 장녹수도 체포되어 참형을 당합니다.
연산군은 결국 '군(君)'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유배된지 일 년도 채 안 되어 중전인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죽고 말았습니다.
흥에 겨워 마음대로 즐기는 모양, 돈이나 물건 따위를 마구쓰는 모양을 일컫는 말인 '흥청망청(興淸亡淸)은
연산군이 만든 '흥청(興淸)'이 '망청(亡淸)'이 되었다고 비웃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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